나의 기록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본문
소설가 경하는 2014년 여름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 그 꿈을 꾼다.
성근 눈이 내리던 벌판, 한족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와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생각하고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걸어가는 데 물이 들어온다.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은 옮겨야 하는 데, 어쩔 줄 모르는 채 검은 나무들 사이를,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린다. 눈을 뜬다.
그리고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경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하고,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그 무엇이 된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가던 그 때, 12월 하순의 아침 인선에게서 문자를 받는다. 인선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입사한 잡지사에서 중요한 인터뷰나 여행 기사를 진행할 때 만났던 동갑내기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이후 이십 년을 친구로 지낸다.
인선은 형제자매없이 마흔 둥이로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일찍 어머니의 노환을 겪는다. 팔 년 전 제주 중산간 마을로 돌아가 어머니를 돌보다 사 년 만에 여의었고, 그 후로 그 집에서 목공방을 운영하며 혼자 머무른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인선은 이십 대 후반부터 다큐멘터리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이 년에 한 편꼴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병원에 찾아가 만난 인선, 전기톱에 잘렸다가 봉합된 검지와 중지의 첫마디들이 붕대 위로 노출되어 있는 부위를 삼분에 한 번씩 계속 바늘로 찔린 채 있다. 앞으로 삼주 정도를 계속해야 된다. 잘린 신경 위쪽을 실리기 위해 계속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껴야 한다.
사 년 전 늦가을, 인선의 어머니 장례 빈소에서 경하는 인선에게 검은 나무들의 꿈 이야기를 꺼내고 함께 통나무들을 심어 먹을 입히고, 눈이 내리길 기다려 그걸 영상으로 담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경하는 그 일을 내내 미루고 마침내 그만두기로 했지만 인선은 그 일을 홀로 시작했었다.
인선은 그에게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 '아마'를 돌보려 제주도로 갈 것을 부탁한다.
이후 경하는 그렇게 찾아간 제주도에서 퍼붓는 눈발과 바람, 어둠 속에서 죽음을 다시 직면하고 '아마'의 주검을 묻는다.
이어지는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겪는 제주의 4.3과 이어온 삶, 그리고 경하를 찾아 제주의 그 집에 온 인선과의 환영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제주의 비극을 두 사람은 다시 마주하고 꿈속의 나무를 심을 땅을 찾는다.
그곳에서 사라지는 인선, 인선은 병상에서 다시 눈을 뜰 것이다.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른 곳에서.
경하는 눈 속에서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는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는다.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을 결코 작별할 수 없음을 잊고 살아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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