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록
눈물 상자 - 한강 본문
옛날,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닌 옛날, '눈물단지'라고 불렸던 한 아이, 배가 고프면 울고, 덮거나 추워도 울고, 몸이 아파도 울던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가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통의 사람들이 결코 예측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눈물을 흘린다.
이른 봄날, 갓 돋아난 연둣빛 잎사귀들이 햇빛에 반짝일 때, 거미줄에 날개가 감긴 잠자리 한 마리를 볼 때, 잠들 무렵 언덕 너머에서 흘러든 조용한 피리 소리를 듣고 울었다. 하루 일에 지친 엄마가 흔들의자에 앉아 쉬는 저년 무렵, 길고 가냘픈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진 걸 볼 때, 키우던 개가 열 시간 동안 진통을 하며 새끼 여섯 마리를 낳는 걸 지켜본 뒤로는 개들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비가 내리기 직전, 부드러운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마를 스치거나, 이웃집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빰을 쓰다듬기만 해도 주르륵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는 '눈물단지, 울보'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눈물울 흘렸고, 층계에 걸터앉아 다를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등에는 커다랗게 낡은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든 아저씨가 찾아온다. 그는 눈물을 모으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팔기도 한 단다.
그는 오 년전쯤 전에, 눈물을 판 대가로 받은 파란 깃털을 갖은 푸른휘파람새 또는 '파란 새벽의 새'와 함께 다닌다.
아저씨는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열어서 큼찍한 검은 상자를 열고, 그것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큰 검은 상자가 검은 비단에 싸여 있고, 그 상자 속에 갖가지 모양의 크로 작은 눈물들이 수많은 보석처럼 진열돼 있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설명한다.
야파 냄새를 맡았을 때 나오는 눈물, 하품한 뒤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 화가 몹시 났을 때 흘리는 주황빛이 도는 눈물, 거짓으로 흘리는 회색 눈물, 잘못을 후회할 때 흘리는 연보랏빛 눈물, 부끄럽거나 자신이 미워서 흘리는 보랏빛 눈물,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할 때 흘리는 검붉은 눈물, 기쁨에 겨워 흘리는 분홍빛 눈물, 누군가 가엷다고 느껴질 때 흘리는 연한 갈색의 눈물, 아기들의 연한 연두색 눈물, 엄마들이 아기들을 위해 흘리는 조금 진한 연두색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푸른빛 눈물, 그리고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뒤에, 아주 오래 울고 난 뒤에, 그 눈물까지 마르고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처음으로 다시 흘리는 붉은 눈물들이 있다.
그리고 순수한 눈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드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을 찾아 아이를 찾아왔다.
아저씨의 부탁을 받은 아이는 아저씨를 만나기 직전 눈물겹게 느껴졌던 갓 피어난 콩꽃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지만,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파란 새벽의 새의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서, 아이는 저 언덕 아래 기찻길을 건너 세 개의 산을 넘어가면 있는 외딴 마을로 아저씨와 함께 떠난다.
그 길에서 아이는 순수한 눈물이란 세상의 모든 눈물이 태어나기 전의 눈물이며, 세상의 모든 눈물이 죽은 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들 사이에 고인 눈물, 그 눈물에 닿는 것만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도 천천히 녹기 시작한다고 알려준다.
또, 아저씨는 설렘이 반짝이 가루와 웃음 반짝이 가루를 아이에게 뿌려서 기쁨과 웃음을 가르쳐준다. 비가 내리자 아저씨는 하늘이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도착한 마을, 그곳에서 만난 할아버지, 눈이 깊었는데 눈물상자 아저씨보다 더 어둡고 슬픈 눈빛을 갖고 있다.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그는 집과 가구들, 뒤뜰의 암탉들까지 전 재산을 주고서 많은 눈물을 사서 인생에 걸친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 눈물을 흘린다.
여기에 덧붙여 눈물상자 아저씨는 할아버지의 얼어붙은 눈물샘까지 아이와 함께 녹여서 자신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해준다.
'......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흘리는 눈물보다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단다. '울면 안 돼!라는 말을 주위에서, 또는 자신에게서 많이 듣고 자란 사람들이지. 또 우리가 눈시울이 찡해지거나 눈앞이 뿌예지기만 하고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있지. 그땐 그림자눈물만 흐르고 있는 거란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림자는 전혀 울지 않는데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 그건 거짓 눈물이야.' 그림자눈물에 대한 아저씨의 설명이다.
아이의 요청에 따라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희붐한 새벽창을 향해 피리를 불고, 애잔한 곡조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에 아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눈물상자 아저씨는 유리잔에 담는다. 피리에 맞추어 파란 새벽의 새는 복숭아 빛 부리를 벌려서 이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닮지 않은 소리로 운다. 아저씨도 처음으로 새의 노래를 들게 되었다.
아저씨는 아이의 눈물 빛에 대해 모든 뜨거움과 서늘함, 가장 눈부신 밝음과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담길 때, 거기 진짜 빛이 어린다면서, 아이의 눈물에는 강인함이 필요하단다. 분노와 부끄러움, 더러움까지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아저씨는 아이에게 그림자눈물을 선물로 준다.
'사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전의 저 할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란다. 아무리 슬퍼도 울지 못해. 다만 다른 점은 내 그림자눈물샘이 언제나 가득 차올라 있다는 거야.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아른아른해질 때가 있지만 곧 발라버리곤 해. 가끔, 자다가 깨어서 빰을 만져보면 젖어 있는 때가 있지만...... 왜 울었는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할 수 없어, 하지만, 그때마다 내 그림자는 많은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지.'
아이는 눈물을 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으면서 아저씨, 파란 새벽의 새와 이별한다.
저자는 십여 년 전의 봄, 대학로에서 덴마크 출신의 중년 남자가 만들고 공연한 일인극 '눈물을 보여드리까요?에서 검은 상자를 들고 무대에 나타나 커다랗고 투명한 눈물방울들을 꺼내 보여주었던 것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눈물을 상자에 모으는 아저씨가 있다'는 설정 외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썼음도 밝혀둔다.
70여 쪽의 짧은 책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눈물을 얼마나 흘렀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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