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록
고산자 - 박범신 본문
고산자 김정호만큼 기록이 없는 경우도 드물듯 하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수록된 '만국경위 지구도변증설'과 '지지변증설', 신헌의 '금당초고'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김고산정호'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록을 모두 합해도 현재의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작품 대다수가 현재가지 전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가 평민의 장인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이는 전통시대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기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인지 김정호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잘못된 사항들이 지금도 수정되지 않은 채 만연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 역시 후기에 그에 대한 완강한 침묵에 대하여 자신만의 대답임을 밝히고 있다.
홍경래의 난 속에서 김정호의 아버지는 황해도 토산현의 봉록도 없고 품계에 들지도 않는 가리 신분의 병방으로 현감의 명에 의해 홍경래 난을 토벌할 지원군을 이끌고 가다 실종되었다. 부용꽃 같이 이뻤다는 정호의 어머니는 물질 나갔다가 죽었다는 데 정호의 기억에는 없다. 그이 아버지는 본향이 충청도 태안반도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때 열살배기 김정호는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병졸들을 찾아달라는 포복탄원을 토산현 누문 앞에서 한다. 이에 함께 연좌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어나지만 현감은 오히려 이들을 옥방에 가두고 반역에 가담하려 했다고 몰아붙일 기세였다. 그러나 이틀 후 함께 실종되었던 사람의 가족인 수돌이 어머니가 관아 앞 산벚나무에 목매달고 죽은 후 사세가 뒤집힌다.
해주목사에 의해 현감은 파직되고 수색대가 조직되었으며 결국, 곡산 방면 고달산 상봉 능선 아래 비탈에서 모두 동사나 아사하여 발견되었다. 모두 스물 넷이었다. 현에서 베낀 엉터리 필사지도를 믿고서 평양성 턱밑의 봉산현까지 1812년 임신년 정월 초 사흗날 신시까지 도달하려다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전정과 군보포와 환곡까지 감면한다는 감언이설에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죽음으로 이끈 엉터리 지도가 김정호의 삶을 결정했음을 저자는 상정한다.
그러나, 이후 전임 현감은 수년 전 집을 떠난 이후 소식이 끓긴 김정호의 형을 홍경래의 수하였음이 밝혀졌다며 죽은 아버지와 정호를 역적으로 몰아간다. 전임현감과의 악연은 마지막에 그가 안동 김문 일족의 전임 형조 참판임이 밝혀지며 절정에 이른다. 결국 토산을 떠난 10살의 어린 정호는 아버지가 죽어간 고달산의 한 동굴에서 죽어가는 한 여인의 젖을 먹소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책은 이 인연이 혜련스님과의 이어지고 다시 딸 순실과 이어지는 과정이 너무나 애절하게 담겨있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하면서 겪었던 고난들, 여기에 천주교 박해까지 참으로 기구하기만 하다.
삼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위당 신헌과 해강 최한기, 오주 이규경에 난고 김병연, 즉 김삿갓과의 만남을 통해 저자는 대동여지도에서 독도가 빠진 것은 축척에 따른 목판본의 한계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집에 불을 놓아서 자신이 남긴 모든 자료를 불태우고 딸 순실과 마포나루에서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가 놓은 불꽃은 한양의 수많은 전각과 누마루를 불쏘시개 삼아 하늘로 옮겨붙는다. 가끔은 훨훨 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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