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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악인열전 - 임종금

바람속 2024. 6. 11. 01:02

 저자는 경남도민일보 홈페이지에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친 연재기사를 다듬어 이 책을 펴냈다. 저자는 기사 상단의 전문을 통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로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 헌병,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의 대표 등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나는 이러한 자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준 자들 역시 이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는 백두산 호랑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김종원, 해방 후 악행으로 해임된 그에게 기회를 주었던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으로 인해 그는 여수, 순천 사건의 살육을 시작으로 다수의 학살을 이끌어 냈다. 한국전 당시 11 사단장이었던 최덕신과 김종원은 산청, 함양 학살 사건 등 지리산 빨치산 토발을 빌미로 민간인을 학살했다.

 또한, 김종원의 든든한 후원자로는 이승만이 있었으며 그는 이승만을 위한 테러의 원상이었다.

 책의 두번째 인물인 이협우는 처음 알게 된 자였다. 광복 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의 우익 청년단장과 민보단 단장이 되어 경주를 피로 물들였다. 또한, 이협우는 부정과 탈법으로  2대부터 3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1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협우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살해된 유족을 잡아들여 처벌한다. 이어 2심 재판부 강안희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이후 그는 경주에서 계속 머물다 1987년 그의 나이 66살인 1987년 사망했다.

 세번째인 박춘금은 일제시대 일본 내 조선인 사회를 폭력으로 장악하였으며, 특히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수습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친일활동을 통해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일본 중의원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 그는 재일본대한미국민단 고문 등 재일교포 내 유지로 활동하다 1973년 82세에 숨졌다.

 네 번째 악질 헌병의 대명사로 저자는 신상묵, 박종표를 다섯 번째 악질 경찰의 대명사로 노덕술을 꼽았다. 이들을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해방 후 다시 경찰이 된 이들, 박종표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사망과 시신유기를 저질렸으며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 정권의 사면으로 최종적으로 7년으로 감형받는다. 신상묵은 해방 후에도 제주도 경찰국장 등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지리산 벌목으로 구속되었으나 196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노덕술은 해방 후 장택상에게 등용되었으며,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그의 비행은 계속될 수 있었다.

 여섯 번째인 김창룡은 일본 헌병 출신으로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색출의 책임자가 되면서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다. 특무 부대장이 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숱한 조작 사건을 날조했으며, 1956년 암살된다. 이승만은 그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 하고, 국군 최초 국군장의 대상이었으며 김구가 죽었을 때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3번이나 조문을 하고 애통해했단다. 특무대는 방첩대, 보안사령부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김동한과 그의 후예들로 이번에 처음 접했다. 김동한은 이동휘 등과 독립운동을 하고자 러시아군에 투신했으나 이후 중국 군벌 휘하를 거쳐 1925년 조선에 들어온 후 극렬 친일파로 변신한다. 그는 간도협조회를 이끌면서 만주 항일조직을 직접적으로 분쇄하고 중국 항일 세력과 이간책을 성공시킨다. 그는 1937년 동북항일연군에 사살당했으나 일본은 2년 뒤 그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웠으며, 김동한에 희곡까지 공모해서 상연되었다. 그의 후예로는 간도특설대와 최남선, 이범익, 이선근, 백선엽, 김백일, 정일권, 배정자, 박정희, 최규하 등이다.

 제목 앞의 '교과서에선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라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