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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록
이순신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을 추적한 프로그램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정예 일본수군은 1592.7.8. 한산대첩에서 73척의 배중 59척이 격파된다. 이 전투는 '근세일본국민사'라는 책에 조선정벌에 사형선고를 내린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의 전선 고바야(돌격선, 노 12개, 전투원12명), 세키부네(노 40~50개, 전투원 30~40명), 그리고 아다케(안택선, 노 90개, 전투원 200명, 총 승선인원 300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일본의 시각을 담았다. 일본의 세익스피어로 불리는 차카마쓰 몬자에몬의 인형극 '본조삼국지'는 소서행장과 복카이센(목해잠, 즉 이순신의 변형) 대결을 그렸다. 보카이센은 바다에 잠긴 괴물로 샤치호코로 변하여 싸우는데 이는 상상속 동물로 ..
2009.6.14. 방영분이다. 거북선의 실체를 찾기위한 탐사대의 1년여에 걸친 장정을 담았다. 물론 그 결과는 실패다. 거제도 칠천도 해저면을 첨단장비로 탐색후 지표면에 56개소, 지층속(2m이내) 57개소를 선정 직접 발굴하였다. 그러나 지층 2m이상 22곳은 미탐사된다. 발굴성과는 16세기때의 사발 파편하나가 전부다. 거북선의 실체를 찾기위한 탐사는 이번까지 총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3~1978의 문화재관리국의 1차 탐사, 해군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단에의한 1989~1991, 1992~1995의 2,3차 탐사가 있었다. 3차탐사에선 가짜 총통 발굴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8.7.~2009.4.의 이번이 경상남도 지원의 4차다. 1982년 영국 포츠머스앞바다의 1542년 침몰된 ..
보물 326호로 지정된 이순신의 장검은 그 명문으로도 유명하다.'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풀어 보면 ‘석자짜리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벌벌 떨고, 한번 휘둘러 적을 쓸어버리니 산하가 피로 물든다' 그러나 이 칼은 그 길이나 무게, 격검흔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때 실제 전투에서 사용된 칼로 보기는 어렵다. 1594년 제작된 걸로 추정되며 길이는 197.5 Cm이다. 제작자는 태귀련과 이무생으로 알려젔다. 그런데 이 방송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직접 전장에서 사용한 칼로 기록에 남아있는 '쌍룡검' 두자루와 외국, 특히 미국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추적을 그리고 있다. "쌍룡검'에 대한 최초의 기록(1825년)은 조선후기의 무신이자 학자인 박중경(순..
2009년 4월 18일 방영되었다. 여기에선 이순신 휘하의 많은 무장 중 5사람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정 운 장군, 녹도진(고흥군 도양읍) 만호, 이순신보다 2살이 많고 무과 급제 역시 6년이 빠르다.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기 까지 이순신의 휘하중 최고의 무장이었다. 이순신역시 그를 신뢰했으며, 사후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영을 위로하였다. 정 걸 장군, 이순신의 조방장으로 고문역을 수행하며, 직접 전투에도 참가했다. 당시 나이 78세로 이순신보다 31세나 많다. 병수사를 모두 역임하였으며, 군신이라 할만하다. 나대용 장군, 너무나 유명한 거북선의 실질적 창제자. 신군안 장군, 이순신이 친필 첩자로 임명한 고흥지방의 해상의병장이다. 송 희립 장군, 이순신의 최측근으로 이순신의 임종시 그를 대신하기도..
견내량, 통영과 거제사이의 바닷길로 최소 폭 180m, 길이 4Km 정도다. 1592년 7월 8일 이곳에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70여척의 적이 정박중이 었다. 이순신은 이들을 유인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그중 59척을 격파하고 불살랐다. 이 작전은 피난민 김천손의 제보에 의해 적을 파악하고, 이후 견내량에서 부터 적을 유인, 약 9천명의 왜군이 수몰되었다. 이 전투로 임진왜란 발발 3개월째 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된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일본의 한 팔을 자른 승리라고 평가했다. 일본은 이후 수전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 한산대첩의 승리요건으로 학익진과, 조선 판옥선의 선회능력, 조선총통의 직사포격을 들고 있다. 특히, 총통의 포격법까지 연구한 것은 돋보인다. 사거리 200보 이내의 ..
1999년 11월 16일 방송분이다. 물론 지금의 연구결과와 비교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방향은 옳은 듯 싶다. 지금도 분분한 실제 전투지점에 대한 고찰은 없다. 척수에 대한 고증 역시 없다. 그리고 한산도가가 수군폐지의 지시가 내렷을 때 지은 시가라는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순신이 다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내륙을 행군하여 군사와 군기, 식량을 조달하는 과정을 직접 찾아가 현장을 확인한 부분은 지금도 그 가치가 충분한 느낌이다. 명량해전때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이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실기'의 철쇄기록을 이용하여 쇠사슬의 사용을 검증한 부분은 흥미롭다, 물론, 지금은 많이 부인되고 있긴 하다. 4톤정도의 무게와 320미터의 길이의 쇠사슬, 막게의 사용 등은 기억해둘 부분이..